능력 있는 치유 목회
지 용 수 목사 (창원양곡교회)미래목회포럼 통합회장 주님은 2천년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지만 그때부터 삶을 시작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세 전부터 계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하늘 영광 옥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것은 모든 사람들의 전인 구원을 위함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여러 차례 예언되어 있음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핵이 되는 예언은 이사야 53장 5절일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런데 주님은 이 지상에 탄생하신 후에 그 예언 그대로 허물로 상처받고 정서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을 바로 세워 주시고, 불안과 스트레스 속에 헤매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죄악으로 찌들어 가는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빛이 어둠을 만나면 어둠이 도망가고, 역사 속에서 어둠이 빛을 이긴 역사가 없듯이 예수님은 어떤 병자를 만나도 병을 치료하시고 어떤 귀신을 만나도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여러분! 목회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 목회 철학은 이렇다! 나의 목회관은 이렇다!”라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 목회’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목회를 수종드는 종들’일 뿐입니다. 주님의 목회관! 주님의 목회 철학을 따라 목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 목회는 이런 것이다!’라고 하면 그건 하나님이 고개 흔드실 일입니다. 목회를 80년을 한 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목회는 영혼만 구원하시는 목회가 아닙니다. 정서적으로 구원하시고 병으로 고생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스트레스, 불안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를 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때때로 눈에 보이는 기적,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육신의 병, 육신의 고통에서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건, 그 이적을 통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방편으로 쓰신 것을 우리가 압니다. 여러분! 만일 주님이 아름다운 설교만 하시고 능력이 흐르지 않았다면, 주님이 바다에 계실 때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로 모였겠습니까? 주님이 산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모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니고데모! 그 자존심 있는 사람이 주님께 밤에 찾아가서 묻는 동기가 어디 있었습니까? “랍비여! 랍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그런 일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찾아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말씀만 전하시고 기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니고데모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아픔이 무엇입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말세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게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목사님이고 전도사님이고 유명한 목사님인데, 능력이 없는 게 자신에게 고통이고 교회에게도 고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능력이 흐르는 사역을 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모적으로 남에게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니 그 사람의 손수건을 갖다가 아픈 자에게 놓아도 병이 낫고 귀신들린 자에게 손수건을 갖다 두어도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저는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도 제 손수건을 쓰는 교인이 없습니다. “목사님! 손수건 좀 빌려 주세요. 우리 집의 애가 아픕니다.” 그런 이야기를 못 들어 보았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능력이 흐르는 목사라면 그런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본받자고 하는데, 저는 반대입니다. 바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호랑이를 닮으려고 해야 토끼라도 되지, 처음부터 토끼를 닮으려고 하면 다람쥐도 되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닮으려고 해서 바울이 된 거지 바울이 베드로를 닮으려고 했으면 바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바울 같은 사도! 바울 같은 목회자들! 능력 있는 목회자들이 많이 일어나면 한국이 다시 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저는 늘 고린도전서 4장 20절을 읽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우리 교회에 정성만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악성 피부병 때문에 가문 논바닥이 터지듯이 피부가 터집니다. 약을 먹으면 자꾸 아물어지는데 간이 상할까봐 약을 중단하면 피부가 갈라지고 하면서 몇 달간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하루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피부처럼 그 아이가 나았습니다. 그 아이가 나은 것 때문에 그 집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까지 열두 명이 교회에 다 나와서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병 고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이 영혼 구원의 큰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까지 치유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시고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 공적으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그리고 옆구리의 창자국, 손의 못자국을 보여 주신 다음에 다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as the father has sent me(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처럼) I'm sending you(나도 너를 보낸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전인 치유를 하라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그 위임을 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물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도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낼 힘을 주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고,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70명을 파송할 때에도 능력을 주셔서 파송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주여!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래, 내가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 그러나 귀신이 쫓겨가는 것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 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사역을 그렇게 하도록 하셨지만 주님이 승천하실 때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주님의 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끝나고 사도행전으로 이어지지만 사실은 사도행전도 주님의 행전, 복음서의 후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하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그대로 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역으로 꽉 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아무리 훌륭한 문필가이고 아무리 놀라운 인격자라고 해도 그에게서 능력이 나가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그를 천사로 대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넬료가 시골 어부 출신 베드로를 뭐 존경할 점이 있다고 그 앞에 엎드려 절했겠습니까? 한 번 설교하는데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능력이 흐르니까 ‘아 저분은 영적인 인물이구나.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듯이 엎드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교회를 진단하기 전에 자기를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를 키우기 전에 자기 영적 키를 키울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키를 체크하고 예수님의 사역, 베드로의 사역, 바울의 사역, 나의 사역을 비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사역을 위임하신 줄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주님이 보내신 자, 주님의 대행자로서 주님의 목회를 펼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기적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 위에서야 합니다. 기적 위에 서면 안됩니다. 바울도 바울이 쓰는 손수건을 언제나 얹어 놓으면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기도해도 에바브로디도 목사님은 낫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찬송해서 감옥 문이 열렸지만 항상 찬송한다고 감옥 문이 열린 것은 아닙니다. 감옥 문이 열려야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고 안 열려야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등이 쓰여져 성경을 이룰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을 행하시고 안 행하시고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우리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능력이 흐르는 목회를 계속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이루시고, 필요하지 않으면 이루시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에 보면 주님이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늘 기도에 힘쓰면 권능을 받는다고 주님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능력을 행하자.”고 저는 오늘 이 시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일을 맡기실 때 일만 맡기지 않으십니다.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파송하실 때에는 일만 맡긴 것이 아닙니다. 능히 애굽의 바로를 꺾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능력도 모세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치유목회의 사명을 주실 때에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를 보내노라.”하신 다음에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받지 못하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말씀 은사를 받으셨습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아니 더 귀한 하나님의 파워, 능력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물론 성령님이 능력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영이 함께함이라.”(찬 427장)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결코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할 때만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건에 실패해도 성령님은 탄식하시지만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든지 능력이 흐르는 목회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1986년부터 시간의 구조 조정을 위해서 아직까지 심방을 안 합니다. 앞으로도 안 할 것입니다. 장로님 댁에도 가지 않습니다. 장로님 부인이 수술을 받아도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저로서는 그렇게 하면 설교 준비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기도와 말씀에만 쏟기 위해 1986년부터 지금까지 심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40일 금식 기도는 생각도 못 해본 사람입니다. 저는 배고파서 못합니다. 저는 철야기도도 잘 못합니다. 기도도 많이 못합니다. 저는 능력을 더 받으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제가 가장 힘쓰는 것은 이미 주신 능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목회가 피어날 줄 믿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한 가난한 어부가 고기를 잡아서 파는데 그날도 고기가 안 잡혀 터벅터벅 ‘언제고 부자가 되면 좋겠다. 나는 부자가 되면 큰 집을 사리라. 내가 부자가 되면 종도 많이 두고 좋은 음식 먹고 살리라. 나는 부자가 되어야 되겠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하고 가다가 발이 돌에 치었습니다. 보니까 어떤 가죽 주머니가 있는데 돌 주머니였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좀 쉬어 가려고 강가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돌 하나씩 집어넣으면서 ‘부자가 되면 좋겠다. 부자가 되면 큰 집 사고, 부자가 되면 종도 좀 여러명 두고, 부자가 되면 불고기도 해먹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꾸 깊은 강에 돌을 던졌는데 구름 속의 달빛에 그 돌들이 번쩍번쩍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개 남았는데 보니 그게 금 덩어리였습니다. 부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 부자가 될 금을 다 버리고 한 개 남은 것입니다. 한개라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능력 받으면 좋겠는데, 능력 받으면 목회 크게 하겠는데, 능력 받으면 사람들에게 순종할텐데, 아 능력 받고 싶어라!” 그러다가 은퇴하시면 천당에 가서 능력 받겠습니까? 성령님이 능력을 행하십니다. 말씀이 능력을 행하십니다. 성찬에 능력이 흐릅니다. 기도에 능력이 흐릅니다. 그것을 활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꼬를 터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우리가 물꼬를 터서 교우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설교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말 더듬고 발음도 안 좋고 참 말주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어디 내가 말 전하나, 하나님 말씀 전하지.’라고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저의 요한계시록에 대해 쓴 책 두 권이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렇게 썼습니다. “목회자의 설교는 대통령의 연설보다 백 배로 더 귀하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구원받을 자 없지만,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 영혼이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내 말 전하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지.’ 그래서 여러분! 이제 제가 하는 대로 제 노하우를 말씀드리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설교 준비할 때 많이 엎드리는 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주의 말씀 준비합니다. 말씀 주세요. 능력의 말씀을 주세요. 구원의 말씀을 주세요. 우리 교회가 살고 한국이 살고 세계가 먹고도 열두 바구니 남는 말씀을 주세요. 이 말씀이 한국과 세계를 살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했지만 나사렛에서 나오신 예수님이 세계를 구원하신 것처럼 창원의 양곡교회와 저의 말씀을 통하여 세계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오래 전부터 기도해 왔습니다. 그랬더니 제 말씀이 172개국에 일단은 증거가 되고, 듣든 안 듣든 그들의 귀를 스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치유하신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신다.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친 다음에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설교하실 때 ‘은혜가 안되면 어떡할꼬!’ 하고 생각하면 은혜가 안됩니다. ‘어디 내가 내 말 전하나? 하나님의 말씀 전하지.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정성 어린 준비를 해야됩니다. 신명나게 해야 됩니다. 정말 목회개발원 원장님은 생명을 걸고 설교를 준비하신다는 데 맞습니다. 우리는 설교가 전문이니까 이 전공에 능력을 쏟아야 됩니다. 제가 현대 호텔에 중요한 기독교 지도자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는데 그 때 세분이 특별 초청을 받아서 특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절, 두 절 부르고 간주가 있은 다음 세 절째 부르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수군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노회장이 설교하는데 노회 보고서를 읽고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게 목회자의 매너입니까? 자기는 다른 분 설교할 때 잘 안 들으면서 어떻게 교인들이 자기 설교를 잘 듣기를 바랍니까? 자기 말 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앉아서 다른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장로님이 옆에서 보고 한숨쉬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건 매너 문제가 아닙니까? 저도 부족한 목사지만 ‘이건 너무했다, 기본이 안됐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마리아 칼라스나 파바로티 같은 세계적인 성악가가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데 수군수군 할 수 있을까? 교인들이 존다고 어떻게 조는 교인만 탓하겠습니까? 설교 듣는 태도가 이렇고 저렇고 교인들만 탓하겠습니까? “쿠오바디스” 같은 영화를 볼 때 두시간 반을 보아도 지겹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30분도 못 들어 지겹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전해서 그렇습니까? 축구경기 구경하다 “아이 시시해라, 교회 가서 목사님 말씀 듣자!” 영화관에서 영화 관람하다 “아이 지겨워! 교회가서 우리 전도사님 말씀 듣자.” 그렇게 되면 좋을 줄 믿습니다. 그렇게 교인들이 깜짝깜짝 놀라게 준비해야 합니다. 왜 목사님이 3년 되면 교인들이 권태를 느끼고, 5년 되면 미워합니까? 점점 다운되니까 그렇습니다. ‘아! 목사님 3년 전에는 저런 말씀 못하셨는데, 어디서 저런 말씀이 나와서 전하시나!’ ‘10년 되었는데 아, 목사님 10년 전에는 저런 말씀 못하셨는데, 언제 저런 깊은 진국 같은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을까!’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한국의 한 교회에서 35년 목회하신 구분에게 제자가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장기 목회에 대성하셨어요?” 하니까 “쉬워요, 가랄 때 안가면 되지.” 그랬답니다. 물론 그 배짱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랄 때 안가면서 있는게 얼마나 고통입니까? “가라 가라” “안 간다” 이게 얼마나 고통입니까? 그런데 가려고 해고 “가시면 안됩니다. 가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이 흥미 있고 기가 판 말씀이라도 한 두 번이면 “야, 좋다! 하지만 거기에 능력이 없고 변화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가 조금 약해도 가슴에 팍팍 부딪치는 게 있고 인격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역사가 나타나면 그것으로 오케이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 저희 교회를 약 90~100명 모일 때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고 담대하게 그리고 설교 시간에 능력이 흐르도록 설교했습니다. 늘 한달에 한 번은 “이웃 교회에서 오신 분들은 돌아가세요.”라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안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가세요.”라고 했고, “새신자만, 안 믿는 사람만 전도합시다.”라고 오늘까지 19년째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도 참 오늘까지 계속해서 행복하도록 하나님이 키워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백웅선이라는 중은 절에서 뭐했습니까? 산에서 뭐했습니까? 불교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성령이 있습니까? 24년 만에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취직하기도 그렇고 사업하기도 그래서 극약을 조금씩 약국에서 사서 먹고 죽을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강 ○○ 집사님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며 전도지 한 장 던져 놓고 갔습니다. 그날이 토요일입니다. 그분이 평생 교회를 모르지만 “그래 죽는 건 하루이틀 미루고 교회가서 구원이 뭔가 한 번 알아보자.”해서 그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셨는데 생사의 기로에 있으니까 그런지 첫날에 말씀에 붙잡혀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자기 어머니 옥여사님을 모시고 오고 그 다음날 여동생 인숙이를 데리고 오고 지금은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지난 봄에 경찰 간부의 부인이 15층 아파트에서 자살하기 위해 떨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살았습니다. 15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는데 티코 자동차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뼈도 안 다쳤습니다. 그걸 저희 교회 최유자 권사님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 간부입니다. 남편이 힘있습니다. 애들도 공부 잘합니다. “사모님! 왜 이런 짓을 했어요?” “살기 싫어요. 살 의미가 없어요. 허무해요. 일찍 죽는 게 나아요.” “사모님은 하나님이 복 주신 분이오. 15층에서 떨어져도 안 돌아가시는 분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위로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떨어질 때 다시 떨어질지라도 우리 교회 한 번만 가보시지요.” 그분이 첫날 은혜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가정이 많습니다. 한 분은 30년간 불교를 믿어온 분인데 라디오 채널을 바꾸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와서 들어 보니 그게 설교였습니다. 자기 발로 울면서 자기발로 기독교 서점에서 성경을 사 가지고 와서 며칠 내로 성경을 읽다가 주일날 나와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담당 교역자한테 “이렇게 허무할 수 있습니까? 30년 내가 섬긴 불교 신앙이 목사님 설교 잠깐 듣고 이렇게 허물어지니, 이렇게 불교가 허무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도 예수 믿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흐릅니다. 우리가 전하면서 막상 우리는 안 믿습니다. 안 믿으니 그렇지, 믿으면 능력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믿음 있는 시간에, 믿음 있는 장소에, 믿음 있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능력을 더 받기 위해 애도 써야 하지만 이미 얻은 능력을 활용합시다. 교회는 주일 낮이나 밤이나 삼일이나 새벽이나 통성기도가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보면 부흥회할 때는 영적으로 뜨거워지다가 부흥회가 끝나면 한 달 두 달 지나 또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부흥회를 하면 또 쭉 올라가다가 또 부흥회가 끝나고 한두 달 지나면 언제 했냐 그럽니다. 그때 ‘어떻게 하면 항상 영적인 상태가 계속 뜨겁게, 높게 유지될 것인가!’ 생각하니 부흥회 때에는 통성기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목회 출발하면서 달란트 기도 시간을 넣었습니다. 주일 낮, 밤, 삼일에도 새벽에도 늘 3분씩 기도 제목을 주어서 달란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고부터 항상 영적으로 훈훈함이 지속됩니다. 신비롭습니다. 기도로 불을 당기니 교회가 훈훈합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주일 밤에는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소서!”하고 특별히 치료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제 경험으로 안수할 때에는 별로입니다. 아무리 머리 꾹꾹 누르고 안수해 보아도 별로 낫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저는 능력이 적은가 봅니다. 그런데 통성기도할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교인들의 믿음이 큰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 덕에 목회합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력을 책으로 다 쓰면 몇 권은 족히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부산 백병원에 어떤 분이 식물인간으로 죽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점치는 사람입니다. 그 여동생 이은희 선생님이 학교 교사이고, 우리 교회 집사님입니다. 그녀의 오빠는 교회 안 다니는데 식물인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일 밤 설교하고 찬송하는데 “목사님! 우리 오빠 예수 안 믿지만 불쌍히 여겨 주세요. 식물인간으로 죽어가는데 하나님 한번 터치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라고 해서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에 ‘식물인간이 어떻게 낫냐?’하면서 혼자 기도는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부산 백병원에서 그 점치는 어머니 눈에 우리 교회 안이 다 보였습니다. 신비로운 이야기를 해서 좀 부담되지만 기독교는 신비주의로 흐르면 안 되지만 신비가 없어서도 안 됩니다. 신비는 있습니다. 그 어머니 눈에 교회 안이 다 보이는데 그 많은 성도들이 손들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옆에서 식물인간으로 있던 아들이 “어머니!”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입니다. 너무 감격해서 신주 모신 것 다 태워버리고 구역장 데려다가 예배드리고 “하나님! 우리 아들 의식 돌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식을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3일 되거든 죽이라도 먹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3일만에 죽 먹었습니다. 죽 먹는 것보고 어머니가 좋아서 우시면서 “하나님! 죽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일 뒤에 밥 먹게 해주세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새신자 기도를 잘 들어 주십니다. 3일 뒤에 밥 먹었습니다. 밥 먹는 것 보고 “하나님! 아버지 밥먹으니 감사합니다. 3일만에 퇴원하게 해주세요.”했는데 퇴원은 안 되었습니다. 보름인가 후에 퇴원했습니다. 지금 식물인간으로 있던 그분은 우리교회 집사님이고 그 집안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교우들의 기도를 목회에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부목사님이 심방가서 저의 기도를 먼저 하고 그 가정을 축복하도록 틀을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부목사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여선교회, 남선교회가 40개 있는데 회의할 때 반드시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한 다음에 회의를 하라고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도 먼저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한 다음에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온 교우들이 매일 한 번 이상 저를 위해 기도합니다. 또 1,400명 다니엘 기도회원들이 하루에 세 번씩 손들고 기도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디를 가도 든든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도의 힘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응답의 불로 그 현장마다 쏟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 교우들의 기도를 많이 활용하십시오. 그리고 저는 언제든지 안수해 드립니다. 물론 제가 안수해도 별로 효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공적으로 안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가끔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손 얹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고, 치료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있고 우리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문을 굴리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는 것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손 얹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낫고 안 낫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손 얹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을 행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낫게 하실 것이고, 아니면 안 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백설이라는 아이는 태어나면서 잘못되어서 장님이 되었습니다. 한 쪽 눈은 완전히 장님이고 한 쪽은 시력이 조금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일주일 금식했습니다.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날 새벽에 제가 이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정말 꿈 속에서 보았습니다. 흰 옷 입고 옆으로 서 계신 주님이 피를 다 쏟으신 후 제 오른손을 꽉 잡으시더니 피에 적십니다. “주님, 왜 그러십니까?” 아무 말씀 안하시고 주님이 제 오른손을 또 피에 적십니다. 이 손이 미웠습니다. “내가 이 손으로 죄를 많이 지었다고, 이 손이……. 하나님, 그렇게 더러워요? 이 손이 그렇게 더러워 다시 주의 피에 적셔야 하나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손은 어떻습니까?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여러분의 손은 거룩합니까? 교인들은 목사의 손은 거룩한 줄 아는데, 정말 우리의 손은 거룩합니까? “주님! 정말 이렇게 더러워요?” 그날 저는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눈에 손대는 순간에 얼마나 제가 위로를 받았는지……. “아이고 하나님! 제 손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이 아이 눈 치료하시려고 적셨군요.” 그리고 이사야 53장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매 맞으신 것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엄마와 아이한테 설명해 주고 손 얹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체크하니까 1.0과 0.8이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구역장이 되셨습니다. 병 고치는 것도 그 아이에게는 복이지만 그때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역을 해야 됩니다. 주의 사역을 해야 됩니다. 물론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무화과나무 반죽으로 낫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의사와 약을 통해서도 역사를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에 가라, 약국에 가라, 기도 할 필요없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장 15~18절) 낫고 안 낫고는 주님이 하실 일이고 우리는 믿고 손을 얹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서울의 큰 교회 L목사님은 저희교회 교단장 하신 분인데 이분이 치료사역을 몰랐습니다. 말씀만 전했습니다. 물론 말씀으로 영혼을 구원하시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병이 치료되는 데는 기대를 안 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60세가 되셔서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권사님의 며느리가 피를 쏟습니다. 걸어가는데 길에서 하혈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며느리가 죽어요. 기도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 목사님이 “권사님! 정신 나갔어요? 빨리 병원에 가야지. 우리 집이 병원이야. 빨리 병원에 데려가요. 병원에…….” “목사님 손만 얹어 주세요.” “권사님! 정신없어. 여기가 병원이야? 내가 의사야? 빨리 데려가!” 그때 목사님의 막내딸이 문 열고 나와서 “아빠! 아빠 목사님이야? 아빠 진짜 목사님 맞아요? 아니 권사님이 여기까지 왔는데, 손 한번 얹고 기도한다고 살 사람이 죽어요? 아빠! 아빠 혹시 가짜 목사 아니에요? 하나님 믿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딸의 소리가 하나님 소리같이 들렸습니다. “권사님, 이리 오세요.” 이 목사님은 안 믿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며느리가 피 흘려 죽네요. 도와주세요. 아멘.”하자 피가 멈추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팔굽혀펴기 150개 합니다. 물론 쉬어가면서 합니다. 제 아들은 쉬지 않고 150개 합니다. 그러나 군에 가기 전에는 40개도 못했습니다. 30개 했는데 미군 부대로 가서 매일 하니까 150개 한꺼번에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힘은 쓰는 대로 성장합니다. 기도 은사도 치유 역사도 하는 사람이 더 잘하게 됩니다. 은사를 잠재우면 못 씁니다. 눈도 붕대로 1년만 막아 놓으면 그 눈 못씁니다. 쓸 때 개발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성찬을 대했습니다. 저희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에도 그냥 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의 살, 주님의 피를 접하는 것, 그것으로만 끝내지 마시고 “주님, 이 시간 성찬을 대할 때 주의 능력이 흐르게 해주옵소서!” 간구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에 다니는 외과의사가 목에 칼을 대 가지고 깁스해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말을 못합니다. 하루에 말을 세 마디 더하면 벙어리가 된답니다. 몇 달을 고생했는데 진료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서 성찬식 하는데 “오늘 성찬을 하면서 육신의 병도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했더니 그 사람이 “아멘.” 그럽니다. ‘저 사람 너무 세게 말해서 벙어리 되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3천만원 감사헌금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손 얹으면 낫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활용을 안 합니다. 저도 기도도 많이 못하고 금식도 못하고 철야도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셨으니 한다.’하는 마음으로 계속합니다. 그러면 첫째로 행복합니다. 저는 19년째 우리 양곡교회를 섬겼는데 2년도 안된 기분입니다. 항상 행복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무슨 일이 터져도 걱정 안 합니다. ‘내 일인가? 주님 일이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 3장 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 우리가 설교하고 안수하고 기도하고 성찬하고 이럴 때만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역사하십니다.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저질러 놓아도 주님이 살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롬 8장 28절) 저는 우리 교회에 문제가 생겨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일이 아니고 망해도 하나님의 교회이고 흥해도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주차장이 부족한데 3부 예배 때 한 450~500대의 차들이옵니다. 대형 버스가 아홉 대입니다. 저는 100억을 투자해도 한 영혼만 구원하면 가치 있는 투자라고 믿습니다. 백화점도 셔틀버스 돌리는데, 목욕탕도 버스 돌리는데, 아무리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한국이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데는 절제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대형 버스 아홉 대 돌립니다. 주차장이 부족해서 2년 전에 45억을 주고 넓은 땅을 샀습니다. 우리 이사회에서 20억 헌금하고, 20억은 은행돈 빌려서 하기로 했는데 IMF가 터졌습니다. 아무리 돈을 모아도 24억 밖에 못 모았습니다. 24억을 땅 주인에게 주고 파약당했습니다. 계약금 7억을 날렸습니다. 교우들의 피땀 어린 헌금 7억을 계약금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7개월 뒤에 17억! 24억에서 7억뺀 17억만 받고 땅 잃고 돈 잃고 제 목회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 오늘까지 모든 일을 다 이루어 주시더니 왜 이번 일은 이렇게 안 됩니까?” 그런데 제 마음에 ‘괜찮다, 괜찮다. 지나가면 간증거리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닙니다. 그 땅 주인은 11개 회사를 가지고 있는 재벌입니다. 그런데 9월에 우리한테 17억 주어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3억도 못 줍니다. 제가 새벽기도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잠깐만 뵙시다.” “왜 그러세요?” “제발 연기 좀 해주세요.” “얼마나요?” 그래서 연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목사님! 살려주세요” “어떻게 해요?” “아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니, 우리는 7억 날렸잖아요. 17억 어서 주세요, 빨리 주세요.”했더니 그 11개 회사의 사장 부인이,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교회 사무실장 앞에 무릎 꿇고 “제발 목사님한테 이야기해서 우리 좀 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우린 돈 빨리 받아야됩니다.” 나중에 “땅 가지고 가시고 17억 받지 말아 주세요.” 45억짜리를 17억에 그냥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살려주세요.” 그래서 살려 주었습니다. 45억짜리 땅을 17억에 등기 냈습니다.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회사가 교회 거래에서 손해본 게 아플까봐 그날 이후로 계속 그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분은 불교 신도입니다. 교회 거래하다가 손해 봤다고 마음 아프지 않게 하시고 예수 믿고 회사가 잘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능력을 행해 나가지만 때로는 말씀대로 안 되고 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목회는 여러분의 목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회입니다. 여러분이 일을 저질러도 주님이 살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뒤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세상 끝까지 함께하십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치유목회를 잘 감당하며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